대구대교구 소속의 젊은 사제 심기열(야고보) 신부는 2022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면직 처분을 받았다. 교구 측은 공식 사유로 “교회법을 어기고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정작 면직 통보 당시 교구는 심 신부에게 아무런 구체적 설명도 하지 않았고, 그에게는 하루아침에 사제직이 박탈되었다. 면직 인사발령 공지에는 그저 “12월 31일부로 ‘휴양’에서 ‘면직’”된다는 행정사항만 적혀 있었을 뿐이다. 평신도들이 보기에 사제가 면직되는 일은 극히 이례적이어서 충격적이지만, 정작 당사자인 심 신부조차 왜 자신이 면직되었는지 이유를 들을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심기열 신부 사건의 내막을 추적하면, 표면적 이유 뒤에 숨겨진 교회 조직의 민낯이 드러난다. 애초에 이 사건은 심 신부가 교회 내부 문제를 용기 있게 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2021년 말, 심 신부는 자신이 보좌로 있던 A본당의 주임신부가 미사와 사목 업무를 소홀히 하고 상습적으로 골프와 당구 등으로 자리를 비우며 업무태만을 보인다고 교구에 고발했다. 젊은 보좌신부가 상급자인 주임신부의 비위를 폭로한 이 행동은 교구 내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실제로 교구 성직자국장은 훗날 법정증언에서 “보통 젊은 보좌신부가 주교님과 본당 신부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일반적이진 않다”고 증언하며, 심 신부의 문제 제기에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음을 드러냈다. 즉 아래로부터의 문제 제기 자체를 불경으로 간주하는 교회 문화가 작동한 것이다.
문제 제기자에 대한 처벌
심기열 신부의 내부 고발에 대한 교구의 대응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제기자에 대한 조직적 응징으로 전개되었다. 교구장은 해당 주임신부의 직무태만 의혹에는 눈을 감은 채, 오히려 심 신부의 태도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2022년 3월, 교구청 총대리주교는 심 신부에게 이메일을 보내 “억압된 감정이 있으니 전문 심리상담가의 상담이 필요하다”고 통보했다. 갑작스레 심리상담 권고가 내려온 것이다. 교구 측은 정체 불명의 내부 ‘자문단’ 의견이라며, 심 신부에게 의사 진단 한 번 없이 ‘편집성 성격장애’가 의심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제를 한 번도 직접 대면하지 않은 익명의 자문단이 “문제가 있다”고 결론짓자, 교구는 곧바로 심 신부를 다른 본당으로 전보 조치한 후 일방적으로 휴양 명령을 내렸다. 휴양 조치는 원래 질병 등의 사유로 요양이 필요한 성직자에게 한시적으로 내려지는 결정이지만, 심 신부의 경우 본인의 동의나 의사의 소견 없이 징계에 준하는 형태로 강행되었다.
교구는 휴양 명령의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는데, 첫째는 심 신부가 14년 전 신학교 입학 당시 받았던 인성검사 결과의 일부 부정적 소견이 최근 악화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당 인성검사에는 어디에도 정신질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심 신부는 정상 범위 판정을 받고 신학교에 입학했었다. 그럼에도 교구는 오래전 검사에서 뽑아낸 몇 줄의 부정적 문구를 억지로 근거 삼아, 현재 심 신부가 “융통성이 부족하고 거짓말을 한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둘째 이유는 더 황당했다. 심 신부가 새로 전보된 본당에서 50대 여성 신자의 호의로 자동차 편의를 얻어 탄 것을 두고 “여성 신자와 지나치게 접촉했다”는 주임신부의 투서를 빌미 삼은 것이다. 코로나로 본당 활동이 위축된 시기, 답답해서 카페에 다녀온 것을 두고마치 큰 문란이라도 있었던 양 문제 삼은 것이다. 이러한 빈약한 근거들로 내려진 휴양 명령은 결국 심 신부를 조직에서 격리시키고 입막음하려는 조치나 다름없었다.
“순명”은 천주교에서 사제가 서약하는 덕목이지만, 이 사건에서 교구는 순명의 개념을 권위적 통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뒤틀었다. 심기열 신부는 교구 명령에 따라 자신이 “멀쩡함”을 증명하기 위해 8개월간 여러 병원과 심리상담센터를 전전하며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어느 곳에서도 치료가 필요한 정신질환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교구는 이런 노력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 신부가 교구가 지정한 특정 정신과 의원에서 치료를 받지 않았고, 치료 상황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불순명”했다고 규정했다. 결국 2022년 12월, 교구는 심기열 신부에게 가차없이 면직 처분을 내렸다. 다시 말해 “윗말을 절대적으로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한 사람의 인생을 징벌한 것이다. 이는 순명이란 미명 하에 비판세력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고, 응하지 않을 시 가차없이 배제하는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라 볼 수 있다. 신앙의 이름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강제하고, 이에 대한 순응 여부를 신앙인의 자격 기준으로 삼는 모습은 종교라는 탈을 쓴 전체주의적 폭압이나 다름없다.
‘정신질환’ 낙인과 권위주의적인 통치
심기열 신부 사건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교회 권력이 정신질환 낙인을 통해 비판자를 손쉽게 매장하려 한 정황이다. 교구가 꾸린 비밀스러운 자문단은 정당한 문제 제기자인 젊은 사제를 순식간에 “병든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의사 면담 한 번 없이 이루어진 이 일방적 판단은 당사자에게 치명적인 낙인이 되었다. 심 신부는 자신의 온전함을 증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교구는 그의 해명을 철저히 외면했다. 결국 그는 설명도 없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한 채 쫓겨나듯 면직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인권을 유린하는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의 전형으로서, 세속 독재 정권에서 반체제 인사를 정신병자로 몰아 탄압하던 수법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심 신부는 “누구 하나 도움을 안 줬다. 내가 강에라도 뛰어들면 이 고통이 끝날까 생각했다”고 토로할 정도로 극심한 좌절을 겪었다. 신앙 공동체에서 있어서는 안 될 비인간적 조치가 교회 지도부의 결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것이다.
사제에게 순명을 강요하고, 불이행 시 정신이상자로 낙인찍어 내쫓는 이러한 행태는 복음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가르쳤건만, 교권주의에 물든 조직은 진실을 말한 자를 오히려 옥죄어 내쫓았다. 약자를 돌보고 상처 입은 자를 치유하기는커녕, 제도 유지를 위해 내부 고발자를 정신병자로 몰아 제거하는 공동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건강한 종교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신자들은 교회에서 위로와 정의를 기대하지만, 제도권 교회는 자신의 권위를 흔드는 이들을 병자로 취급하며 배척하는 윤리적 일탈을 서슴지 않았다. 심기열 신부 한 사람에게 가해진 부당한 낙인은 사실 한국 천주교 조직 전체에 찍힌 불명예의 낙인이나 다름없다. 복음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잔인한 권력 행사는, 한국 교회 내 권위주의의 뿌리 깊은 폐해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성범죄 앞에서는 관대하고, 내부 고발에는 옹졸한 이중 기준
이 사건은 천주교회 내부 징계의 심각한 이중 잣대를 여실히 드러낸다. 심기열 신부에게 적용된 잣대와, 정작 중대한 비위를 저지른 성직자들에게 적용된 잣대는 극명하게 달랐다. 취재 결과에 따르면, 대구대교구 내에서 심기열 신부 이전에 면직 처분을 받은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나마 있는 사례들도 비위의 성격이 전혀 달랐다. 교구 성직자국장의 법정 증언에 의하면 지난 20여 년간 대구대교구에서 면직된 사제는 단 세 명에 불과했는데, 그 중 둘은 여자 문제와 금전 문제로 인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가 심기열 신부 건이었다. 심지어 아래와 같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제들도 모두 면직만은 면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처럼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성직자들조차 면직의 최후 처분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사제들을 모두 제치고 심기열 신부만이 면직됐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회가 성범죄나 중대한 비위 행위 앞에서는 놀라울 만큼 관대하거나 제 식구 챙기기에 급급했지만, 정작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를 향해서는 가혹하기 그지없었다는 방증이다. 한국 천주교가 도덕성을 이유로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일 때, 정작 그 내부에서는 성직자들의 성범죄도 감싸 안으며 조직의 체면을 우선해왔다. 그러면서 교회 지도부의 폐부를 찌르는 내부 비판에는 즉각 면직이라는 극형을 내림으로써 ‘괘씸죄’에 대한 응징을 가장 우선하는 이중성과 위선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교회 조직이 표면적으로는 신앙과 도덕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조직 유지와 권위 보호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회법과 제도는 때때로 범죄자를 감싸는 방패막이가 되고, 반대로 정의를 부르짖는 내부인에게는 칼날이 된다. 죄를 뉘우치면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던 복음의 가르침이, 정작 성범죄를 저지른 성직자들에게 적용되는 모양새는 실로 안이하고 너그럽다. 그러나 권위에 도전한 이들에게는 “한 번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단호한 처벌을 내리는 현실v.daum.net은, 교회 권력자들이 말하는 자비와 용서의 이면에 숨은 권위적 본성을 드러낼 뿐이다. 결국 심기열 신부 사건은 한국 천주교회 내에 뿌리박힌 성직자 우대 문화와 내부 비판 억압 문화가 어떻게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루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교회법이라는 방패 뒤에 숨은 세속적 책임 회피
심기열 신부 사건은 한편으로 교회가 세속적 책임을 얼마나 용이하게 회피할 수 있는 구조인지를 폭로했다. 교구의 부당한 처분에 맞서 심 신부는 2023년 2월 부당해고 무효 소송을 제기했지만, 한국 사법체계는 교회의 벽 앞에 사실상 손을 놓아버렸다. 1심 법원은 “신부는 노동자가 아닌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아예 본안 판단도 하지 않은 채 소송을 각하해버렸다. 이후 진행된 2심 재판부 역시 같은 논리로 각하 결정을 내렸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일반 국민으로서의 권리 의무를 규율하는 것이 아닌 이상, 원칙적으로 실체적인 판단을 하지 아니함으로써 종교단체의 자율권을 최대한 보장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요컨대 교회 내부 문제는 교회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지 국가법이 간섭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설령 교회 내부에서 누군가 인권을 침해당하고 억울한 해고를 당해도 세속 법은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심기열 신부의 경우, 소송을 통해서조차 자신의 면직 사유조차 듣지 못한 채 법정구제의 문이 닫혀버렸다. 천주교회의 자치권이라는 이름의 성역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세속의 다른 기관들 역시 모두 교회의 울타리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심 신부는 마지막 방법으로 2024년 국가인권위원회에 자신의 인권침해에 대한 진정을 넣었다. 그러나 인권위조차 불과 열이틀 만에 사건을 각하하며 사실상 손을 떼어버렸다. 종교단체 내부 사안은 인권위 조사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심 신부가 연락해 본 다른 교구의 사제들 역시 “타 교구의 일에는 관여할 수 없다”는 답만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외부로부터 어떠한 견제도 받지 않는 폐쇄적 구조 안에서, 교구장은 절대권력에 가까운 영향력을 행사한다. 면직 결정 과정에서 보이듯, 몇몇 핵심 성직자들로 구성된 밀실회의에서 이미 결론을 정해두고 명분을 꾸며내는 전략을 세운 정황까지 드러났다. 실제 입수된 2022년 11월 22일자 대구대교구 참사회 회의록에 따르면, 교구는 “정직을 거쳐 면직까지 가려면 근거 대기가 어렵다”면서 “차라리 바로 면직부터 내리자”고 결정했다. 절차적 정당성이나 객관적 근거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문제 인물을 조용히 제거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이런 의사결정 구조하에서 평범한 신자나 하급 성직자가 자신의 권리를 지킬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법이라는 보이지 않는 방패를 앞세운 조직 앞에서, 세속의 법과 제도, 그리고 사회적 감시는 모두 무력화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한 개인의 존엄과 권리는 조직 보전을 위해 손쉽게 짓밟힐 위험에 노출된다. 바로 이것이 교회 내 폐쇄성과 권한 집중이 빚어낸 위험이다.
내부 자정 능력의 한계와 개혁 불가능성
심기열 신부 사건을 통해 본 한국 천주교 조직은 내부에서의 자정 능력이 거의 전무한 폐쇄 체계임이 드러난다. 우선, 부조리와 비리를 바로잡을 내부 고발자가 나온다 한들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응원이나 개선이 아니라 보복과 낙인이었다. 교회 내부에는 견제와 균형의 장치가 사실상 작동하지 않으며, 사제단 혹은 평신도단 차원에서 건강한 비판 여론이 힘을 얻기도 어려운 구조임이 확인되었다. 심기열 신부의 경우만 보아도, 동일 교구 내에서 그의 억울함에 공감하여 목소리를 낸 동료나 상급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교구의 사제들마저 “남의 교구 일에 간섭할 수 없다”는 관망으로 일관했으며, 교회 내부에서 그 누구도 심 신부의 편에 서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곧 한국 천주교회의 공고한 침묵의 카르텔을 의미한다. 은폐와 묵인이 관행화된 조직문화 아래에서는 설령 내부적으로 개혁을 바라는 양심들이 있더라도 쉽게 침묵을 강요당한다. 실제로 심 신부는 “솔직히 제 주변에도 말 못 하게 옷 벗은 동료들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교구의 만행으로 억울하게 축출되었지만 조용히 사제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피해자들이 과거에도 숱했다는 뜻이다. 이토록 음지에 묻힌 사례들이 쌓여 있음에도, 교회 조직은 그것을 반성하거나 고치는 대신 더 깊이 숨기고 잊는 데 급급했다.
교회 지도부 스스로가 문제의 일부이기에, 자기 혁신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구조적 한계도 명확하다. 대구대교구의 사례를 넘어, 한국 천주교 전체로 시선을 넓혀 보자. 한국 천주교회는 한때 사회 정의와 민주화를 위해 앞장섰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자신의 집 안에서는 비민주적 행태와 부패를 용인해온 모순을 안고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조차 2014년 방한 당시 한국 주교단을 향해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유혹”에 대해 경고하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는 교회”를 촉구했었다. 이는 한국 천주교 내부의 세속화와 성직자 특권의 문제를 꼬집은 것이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황의 당부는 공허했다. 여전히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당연시하고, 평신도들의 눈높이와 동떨어진 특권의식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 사제들 간 서로 감싸주기, 평신도에 대한 불통과 군림, 문제 제기에 대한 조직적 탄압 등은 시대가 바뀌어도 개선될 기미가 없다. 이는 단지 특정 교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의 구조적 병폐다. 설령 몇몇 개혁적인 목소리가 있어도, 거대한 성직주의 문화와 경직된 교권 구조 속에서 금세 힘을 잃고 만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즉 그릇된 것을 깨뜨리고 옳은 것을 세운다는 가르침이 교회 스스로 적용되지 않는 이상, 내부로부터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 천주교 조직은 이미 자기 정화 능력을 상실한 채 고인 물처럼 정체되어 있다.
위선적 구조, 지속 가능하지 않다
심기열 신부의 면직 사건을 둘러싼 진실은 한국 천주교 제도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위선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교회는 겉으로는 사랑과 정의, 인권과 자비를 말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복음의 이름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의구현”을 외치던 교회가 정작 내부 정의 구현에는 실패하고, 오히려 불의에 맞선 이를 희생양 삼았다. 약자를 돌보라 가르치면서 조직을 위협하는 내부 고발자는 짓밟았다. 이것은 더 이상 신앙의 탈을 쓴 조직적 위선에 불과하다. 신자들의 신앙 양심과 교회 제도의 현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윤리적 괴리가 벌어지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러한 권위주의적 폐쇄 구조를 이대로 지속할 수 없다. 현재의 교회 제도는 스스로 개혁할 의지도, 능력도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내부 폭로자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인권 유린과 성범죄 앞에서의 이중 잣대라는 치명적 부패만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하나다. 이 부패한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근본적인 붕괴와 쇄신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썩은 가지는 쳐내고 새순이 돋아나듯이, 한국 천주교 조직 또한 시대의 정의로운 심판대 앞에서 그 거대한 허물을 벗어던져야 한다. 신앙의 본질을 거스르는 부패한 권력 구조는 역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교회는 기득권 체제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받고 있다. 만일 그리하지 못한다면, 한국 천주교 제도는 머지않아 신자들의 신뢰와 사회의 존경을 잃고 거대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될 뿐이다. 조직의 안위를 위해 복음의 핵심 가치를 저버리는 거짓된 교회는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살아 있는 신앙 공동체의 회복이지, 썩은 권위에 집착하는 기관의 연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속 불가능한 것은 결국 사라지기 마련이며, 한국 천주교회의 미래 역시 예외일 수 없다.